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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사진

아! 옛날이여2

2010-08-29 10:49:23
[창간 60주년 전북일보의 기록](71)추억속으로 사라진 옛 전주우체국1969년 5월 촬영

전주우체국이 출범한 지도 114년이 됐다. 1896년 2월10일 전주부에 우체사(조선 후기의 체신행정관서)가 개설(농상공부령 제1호)됐다. 전주(일본) 우편 수취소는 1902년 전주 부내면 행동(현재 고사동)에 설치됐다. 전주 우체국(현재 경원동 우체국)은 1915년 12월12일 르네상스식 건축양식으로 신축 이전해 우편활동을 시작했다.
1979년 12월12일 전주 우체국은 전주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인 옛 공보관 사거리에 옛 청사를 헐고 현 청사를 준공했다. 당시 전북일보사가 주최한 세계 최고의 동방 서커스단이 내한 공연한다는 아치가 이채롭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전주 우체국 건물은 사진으로만 추억 속에 남아 있다. / 정지영ㆍ디지털 자료화사업 기획위원
 
[창간 60주년 전북일보의 기록](52)구름다리 오목교1980년 4월 촬영

'우리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우리 처음사랑한 곳도 목화밭이라네.'
흘러간 가요 '목화밭'을 따라 옛 추억이 떠오른다.
노모(老母)는 머리가 파묻힐 정도로 무거운 짐을 이고도 발걸음이 가볍다. 시집갈 딸을 위해 며칠이고 밤을 새며 혼수품으로 보낼 이불을 만들 것이다.
목화는 한 여름에는 연노랑과 자주꽃으로, 만추(晩秋)에는 하얀 솜이 눈처럼 피어난다. 가을에 수확한 목화는 씨아틀에서 씨를 빼고 솜틀집에서 솜으로 만들었다.
 
[창간 60주년 전북일보의 기록](40) 장마로 전주천 범람1969년 6월 촬영

 1969년 6월 5일 새벽에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전주천이 범람했다. 남부시장 하천부지에 설치했던 70여개 점포는 물에 잠겼으며 천변에 쌓아두었던 물건들이 유실돼 상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남부시장 근대화사업이 진행 중이었고, 상인들은 천변에 임시상가를 마련한 상황이어서 피해가 더 컸다. 그러나 다행히도 긴급출동한 경찰과 소방관, 공무원들이 주민들을 대피시켜 인명 피해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장마철에는 사전 점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리미리 대책만 잘 세워놓아도 피해를 막을 수 있다.
 
[창간 60주년 전북일보의 기록]1960~70년대 '단오 풍경'⑦1975년 촬영
 덕진연못이 피부병은 물론 만병통치까지 되는 신선약수로 소문나면서 단오가 되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멱을 감았다.
 
창간 60주년 전북일보의 기록](26)한벽당 오모가리1966년 7월 촬영

'한벽당 오모가리탕을 아십니까?'.
삼복 더위. 이 시절 전주에서 일등 피서는 수양버들 늘어진 한벽당 근처에서 오모가리탕을 먹는 것이었다. '오모가리'란 '오가리(뚝배기의 전라도사투리)'의 애칭. 오모가리에 민물고기를 넣고 끓인 오모가리탕은 전주 천변 평상에 앉아먹어야 제 맛이다.
슬치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상관 계곡과 은석동, 신리, 색장리를 거쳐 좁은목을 휘감아돌아 한벽당 바위에 부딪쳐 물이 하얀 옥처럼 부서진다해서 옥류천이다. 여기서 잡은 산천어나 피라미로 끓인 오모가리탕의 맛은 30℃가 넘는 무더위에도 별미다.
지금도 한벽당 오모가리탕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때 그 추억은 무엇에 비하랴.
 
창간 60주년 전북일보의 기록](19)모내기 노력봉사 대원1979년 6월 촬영

한 해 농사가 나라 경제를 좌우했던 시절. 풍년이 들어야 시골 인심도 나고 도시 인심도 난다는 말이 있었다. 쌀이 주식이었던 1970년대. 그만큼 쌀 농사는 절대적이었다.
사진은 중·고등학생들이 체육복 차림으로 모를 심는 장면이다. 당시에는 6월 농사철이 되면 민·관·군은 물론, 학생까지 모내기 노력 봉사단을 결성해 바쁜 농촌에 일손을 보탰다. 수백명씩 동원 모내기를 한 셈. 지금이야 기계로 혼자서 수십 ha씩 모를 심지만, 70년대 이양기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이양기는 보행 이야기로, 1973년 첫 선을 보였다.
 
창간 60주년 전북일보의 기록]⑫전주교 준공 개통식1965년 9월 촬영

전주교의 또다른 이름 '싸전다리'는 옛날에 시골에서 쌀을 가져와 이곳 나무다리 양쪽에서 싸전을 벌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22년 전주교가 건립됐는데, 전주교는 전북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였다. 그래서인지 1936년 전주 대홍수에도 이 다리는 유실되지 않았다.
이 긴 역사를 지닌 전주교는 1964년 다시 착공, 1965년 9월에 준공·개통됐다. 폭 25m, 길이 78m로 그 때만 해도 국내에서 손꼽히는 교량이었다. 개통식장에서 호남국토건설국으로부터 전주시에 인계됐다. 당시 전북일보 기사에 따르면 남원 순창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하루에 1만7000여명의 통행자와 800여대의 자동차, 수많은 우마차가 다녔다고 한다.

[창간 60주년 전북일보의 기록]⑦계화도 방조제 공사1965년 2월 18일 촬영

 1965년 섬진댐이 준공됐다. 이 댐이 건설되면서 임실군 운암면 일대 2천7백세대는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주민들의 정착 후보지로 선정된 곳이 계화 간척지다.
계화지구 대단위농업종합개발은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1963년~1968년까지 계화도와 육지를 연결해 방조제를 완공하고 이후 1978년까지 10년에 걸쳐 방조제 안쪽에 조성된 해안간척지를 개발하는 사업이었다. 청호저수지가 축조되고, 동진강도수로 경지 정리 및 도시형 주택단지 건설공사가 진행됐다. 어촌이었던 창북리와 계화리에는 주택 1천동이 조성됐다. 섬진댐 이주민을 위한 것이었다. 1977년부터 1980년 사이, 운암면 일대 수몰민 1천9백여 세대가 이주해 정착했으며, 78년부터는 계화미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계화도 간척지 공사현장을 찍은 것이다.
 
②군산 해망동1969년 9월 4일 촬영

 군산 해망동은 군산의 대표적인 동네다. 한때 해망동은 군산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이곳 해망동 어판장은 안강만 어선들이 연평도와 흑산도 밖에서 잡은 싱싱한 생선을 어판장에서 이른 새벽에 위판하는 광경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특히 60년대와 70년대 군산 경제는 수산업과 합판산업이 이끌었는데, 그 때 해망동은 군산 산업의 중요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중심지였다.
그러나 지금 해망동은 쇠락한 동네가 되었다. 군산의 산업이 쇠퇴하면서 해망동의 빛나던 과거는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이 사진은 1960년대 말, 군산 옥구지역에 콜레라가 발생해 일곱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입원하는 등 보건당국을 긴장시켰던 당시, 해망동 풍경이다. 그때 콜레라가 번지면서 해망동 일대는 물론, 군산항까지 봉쇄되었으며, 어류 판매도 일절 금지됐다.
 
③한벽당 터널1970년 11월 3일 촬영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한벽당 터널을 통과해 승암산 기슭에서 나무를 해 와 싸전다리 옆에서 팔기도 하고 집에서 때기도 했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한 짐 가득 나무를 해오는 날이면 왠지 마음 한 구석이 든든했다.
이 철길은 황인성 전라북도지사가 1977년 12월 '전국새마을대회'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철도 이설사업을 건의하면서 철길로서는 그 생명을 다하게 됐다. 전주시내를 가로지르던 철도가 동전주 개발에 걸림돌이 되자 황지사는 전주철도 이설사업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강조했고, 대통령은 1981년까지 철도이설공사를 끝내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북전주역에서 신리역까지 시내 중심가를 지나던 13.7km의 철길은 사라지고, 1981년 5월 25일 신역 준공과 동시에 현재의 전주역과 아중역을 거쳐 색장리 신리역까지 17.4km에 이르는 새 노선이 놓여졌다. 폐선부지를 개발하면서 전주의 균형발전이 이뤄진 것이다.
 
④용머리 고개1965년 10월 촬영

용이 승천하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버렸다는 용머리고개. 전주 서남쪽에 있는 관문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김제나 정읍, 부안, 고창 등을 가려면 용머리고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는 오늘도 이 고개를 넘지만 아무런 뜻을 모른다. 그래서 용머리고개에 관한 시 한 구절을 옮겨본다.
' (…) / 용머리 고개에는 / 관군들의 대포와 머리를 쳐부수던 / 동학군들의 녹슨 곡갱이와 낫을 달궈 / 무지개 일렁이는 날을 놓아 / 비석거리의 반골을 불러모으는 / 대장간 풀무쟁이가 살고 있다 / 용머리 고개에는 깨어진 용마루 기왓장마다 / 퉤퉤 침을 뱉으며 / 시퍼런 욕을 노비문서처럼 뿌리고 다니는 / 욕쟁이 할머니가 살고 있다'
전주의 정군수 시인 작품이다.
 
창간 60주년 전북일보의 기록](37)전주고 화재1969년 10월 촬영

 27~28일 전주고등학교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학교 후관 2·3학년 교실 19곳과 물리화학 실험실 교실 21곳이 모두 탔고, 전주 북중학교 본관 교실 23곳이 전소 돼 교사와 학생, 학부모 모두 망연자실했었다. 화재 현장에는 전주소방서 소방대원을 비롯해 학생, 교사 등이 위험을 무릅쓰고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삽시간에 번진 불로 건물은 앙상한 뼈대만 남겼다. 당시 경찰은 원한 관계로 인한 방화로 보고 현지에 수사본부를 설치, 광범위하게 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범인은 전고 재학생으로 밝혀져 온 시민이 경악해야만 했다.
/ 정지영 디지털자료화사업 기획위원

82.7.10 신흥고등학교 화재

[창간 60주년 전북일보의 기록]

철조망학교에서 가져옴

오목대쪽에서 찍은 철길 같군요. 철길 옆 학교는 제가 62~64년도 다닌 전주여자고등학교  후관, 강당, 가건물,본관 등이보이는 군요. 기와지붕은 교동쪽임. 전주여자고등학교 뒷 건물은 전주 여자중학교 입니다.